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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 - 가인과 아벨의 제사
Big Title
창세기 4장 3-8절
할렐루야! 오늘은 하나님의 역사 창세기 중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아담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에서 살다가 아들들을 낳게 되었는데 첫째가 가인이요, 둘째가 아벨 이였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아들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것을 드리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 사건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을까요?
성경이 기록된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교부들과 학자들, 그외에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아주 정확한 답을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기된 이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과 학설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로 볼수 있는데
첫번째는 제사에 드린 예물의 문제 이며, 두번째는 제사를 드린 사람의 자세에 대한 문제로 볼수 있습니다.
첫번째 주장은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의 피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를 상징한다고 하는 것이며
두번째 주장은 아벨은 믿음의 자세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형식에만 의존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히브리서 11장 4절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뭏튼 위와 같은 주장과 학설들은 지금까지도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나 성경해석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어떤 주장도 맞고, 틀리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러한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시각을 중심으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현재 우리가 드리는 제사, 즉 예배와 어떤 점은 닮아있고 어떤 점을 다른지, 그리고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예배에 임재하실지. 또한 더불어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어떠한 예배를 드려야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배가 될 것인지를 중심으로 같이 연구해보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무엇일까? 하는 것과 두번째 만약에 가인처럼 실패한 예배를 경험했을 때 과연 우리는 가인과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 연구를 해보겠습니다.
첫번째.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의 근본적인 차이점
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짐작해 볼수 있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이본문이 첫번째 제사는 아니었을 것 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난 후에란 처음부터 제사를 안지내다가 한참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제사를 드렸다라기 보다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오직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었을 것이기에 해마다 때가되면 제사를 지낼 때가 되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의 제물도 그해동안 수고한 대가로 얻어진 소산물로 드렸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났다 라는 이 세월속에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저주한 대로 아담은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신것처럼 땅의 소산을 가꾸는 시간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로 필연적으로 해야할 평생의 짐이 바로 이 수고이고 이 수고를 통해서 얻게된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의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수고가 얼마나 고되냐 하면
“땅이 네게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이 수고해야 할 그 땅은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통해 아담의 수고에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의 대가로 간신히 채소을 먹을 수 있다 라는 것 입니다.
그러니 이런 수고를 하는 아담의 얼굴에 미소가 있을 수가 없고 평화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땀에 찌든 피곤한 모습과 피곤함에 오는 짜증이 그의 얼굴을 덮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와 땀의 고통을 아담의 첫번째 아들인 가인이 대를 이어 수고 하고 있으니 가인의 마음도 말이 아니였을 것이며 그의 얼굴에도 피곤함과 짜증스러움이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제사를 드릴 때 이러한 마음의 자세와 얼굴로 하나님께 드렸다면 과연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벨의 예배는 어떠했습니까?
아벨은 양을 치는 자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자기가 수고한 댓가로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양의 새끼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자신이 수고해서 얻은 양의 새끼를 드렸을 것입니다. 당시 양은 사람들이 먹는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 하기 전이기 때문에 오직 양은 그 양털을 통해 옷을 해입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그 양의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매번 양의 털을 가인에게 주고 곡식을 받아서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즉 아벨에게 양은 흔했고 곡식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벨이 제사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귀한 제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싶은데 자기 먹기에도 부족한 곡식을 드릴 수가 없어서 자기에게 흔하디 흔한 양의 새끼, 그나마 처음의 수확인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면
과연 아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께 귀한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드릴 수가 없는 그의 마음,
너무도 감사해서 정말로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그 마음, 그런데 드리지 못하는 그마음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한마디로 아벨의 그 애통하고 절절한 마음의 심정이 하나님의 예배에 제물이 되었습니다.
시편 51편 17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에서 상한 심령이란 그의 마음이 애통함으로 깨어져서 본래 그의 마음속에 있던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 예를 들면 소유욕, 명예욕, 정욕, 등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그 상한 심령을 위로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 한없이 갈구하며 갈망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 질수밖에 없고 그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영광받으시고 기뻐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어찌보면 하나님은 제물에 차별을 두시는 것처럼 보일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물로 차별을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곡식의 제사도 양의 첫새끼의 제사도 하나님께서는 받치는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양의 첫새끼의 제물이 아니라 좀더 좋은 것으로 드리고 싶은데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는 아벨의 마음을 예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믿음이 되는 것이고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가인의 제사는 남들이 다드리는 예배 입니다. 때가 되면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 입니다..
이한 예배 안에는 오직 형식과 체면, 그리고 겉멋만 있습니다. 그예배에는 애통함도 없었고 갈망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안타까운 마음, 애통한 심정, 상한 심령으로 드려지는 예배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데 드리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안타까움과 애통함 심정속에 하나님께 상한 심령으로 간구하는 예배 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형식과 체면이 가득한 예배입니까? 상한 심령에 하나님을 갈구하는 예배입니까?
자 이제 두번째 가인의 실패한 예배를 드렸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인은 하나님은 자신의 예배를 당연히 받으셔야 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수고하고 고통의 땀을 통해 얻은 수확으로 드린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를 인정해 달라는 공로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인은 속으로 “내가 이 예배를 드릴려고 얼마나 땅을 파고 씨를 뿌려 수확했는데 어떻게 내 예배를 안받으실 수 있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공로의식은 “내가 얼마나 그것을 할려고 고생했는데, 내가 너땜에 그것까지 했는데… 내가, 내가, 내가..”
그동안 자신이 흘린 피와 땅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이 생각은 집착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 한 가운데는 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그 예배를 위해 수고 하였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인은 자신이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아닌 자신 중심의 예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공로의식에 꽉찬 이기주의 적인 예배는 오히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정죄하는 죄로 물든 예배가 될뿐입니다.
실패한 제사로 분해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너 가인아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나는 안다. 네가 마음을 잘못 먹어서 네 죄가 네 문앞에 도사리고 있다. 죄가 너를 다스리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라”
하지만 가인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의 아우 아벨을 죽입니다.
결국 잘못된 제사, 즉 잘못된 예배를 통해 가인은 자기의 동생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우리를 돌아봅시다.
나는 과연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형식과 체면에 어쩔수 없이 드리는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바로 가인이 드린 예배입니다. 그 예배에서 나를 알아주면 내가 기쁘고 그 예배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기분나쁘다면 당신은 분명 가인의 예배 가운데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 예배는 생명력이 없기에 아무리 예배를 들여도 나의 심령이 살아 역사하지 않으며 예배를 드리면 드릴 수록 남이 잘되는 꼴도 보기 싫고 오직 내 눈에 거슬린 것만 보여서 꼴보기 싫은 사람들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아벨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으로 드리고 싶은 예배, 나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픈 예배, 그런 예배를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렐루야
이제 우리는 앞으로 이런 예배를 드리기를 결단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시겠습니다.
